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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다, 쓰다

자전거 여행

뒤늦게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읽었다. 몇 문장을 옮겨둔다. 글 전체가 하나의 건축물처럼 오롯이 아름다워 부분을 들어내면 무너질까 차마 옮기지 못한 것들도 있다. 실은 그것들이 가장 좋다, 이를테면 봄의 꽃을 묘사한 글이나 백골로 가지런히 누워 쉬는 죽음 너머의 꿈, 섬진강 덕치마을에 대한 단상 같은 것. 허나 감탄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문장을 구태여 옮긴다. 


/ 사람은 새처럼 옮겨다니며 살 수가 없으므로 이 기진맥진한 강가에서 또 봄을 맞는다. 살아갈수록 풀리고 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은 점점 더 고단해지고 쓸쓸해진다. 늙은 말이 무거운 짐을 싣고 네 발로 서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엉기는 것 같다. 겨우, 그러나 기어코 봄은 오는데, 그 봄에도 손잡이 떨어진 냄비 속에서 한 움큼의 냉이와 된장은 이 기적의 국물을 빚어낸다. 사람도 봄나물처럼 엽록소를 피부에 지니고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냉이된장국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슬퍼했다. 아내를 위로한다고 꺼낸 말이 또 이 지경이 되었다.


/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5월의 찻잔 속에서는 이 집합부의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꿰맨 자리가 없거나 꿰맨 자리가 말끔한 곳이 낙원이다. 꿰맨 자리가 터지면 지옥인데, 이 세상의 모든 꿰맨 자리는 마침내 터지고, 기어이 터진다. (중략)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적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 쪽이고, 그 안쪽은 생명의 기능이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 삶속에서 벌어진 일들 중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다산의 치욕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그가 한평생 간직했던 침묵이다. 치욕은 생애의 중요한 주분이고, 침묵은 역사의 일부다.


/ 인수는 자라서 시인이 되려나보다. 그런데 인수한테 물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인수는 자라서 형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왜 하필 형사냐?" 라고 내가 묻자 "형사가 되어서 나쁜 놈들을 다 잡아 가두겠다"라고 인수는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명백한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린 인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인수가 세상의 악을 알아가는 마음의 과정들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