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불편하게 설계된 우주 속에서 잠시 위로 솟아난 현상이자 일시적인 부조화일 뿐이란다. 열의 죽음은 우주의 종말이자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인데, 삶은 그 기초가 되는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야.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 헛되다고 해서 가치가 덜한 것은 물론 아니란다."
- 마크 롤랜즈, 철학자가 달린다 中 -
비교적 어린 시절 몹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탓에, 사춘기 무렵부터 삶은 결국 무無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꽤 사실적으로 인지했던 것 같다. 당장 어제 안았던 육신이 오늘 흔적없이 스러질 수 있다는 것, 모든 사건과 사고, 죽음과 소멸은 나나 내 사유의 납득 범위와 아무 관계 없이 시작되고 완결되며 내겐 그 흐름을 막을 하등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다행한 일은 '죽음은 숙명이고 모든 소중한 것은 사라진다'는 어린 인식이 오랜 허무감이나 우울감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므로 무의미하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강렬한 감각들이 있었다. 인생을 걸고 나를 보호해준 혈육의 애정, 타인으로부터 (단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진정 이해 받았다 느꼈을 때의 환희, 훌륭한 글을 읽거나 무언가를 쓸 때 손끝까지 저릿하게 내달리는 기쁨, 사랑하는 이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쓸어볼 때 느끼는 안도감과 애틋함 같은 것. 살아온 시간 전체를 의미화하는 순간, 진실로 살아있는 순간. 단지 그 순간들만으로도 나는 죽음으로 귀결될 이 삶이 가치있음을 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꽤 오랫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라 답했던 것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같이, 무수한 동사와 형용사 앞에 붙어 전에 한 모든 행동과 의미와 동작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근사한 부사. 이 부사가 내게 특별한 순간은 '모르고서 맹목적으로 몰입하는 무엇'을 단호한 태도로 용납지 않을 때이다. 충분히 알고, 그 단점과 괴로움까지도 인지하나 그것을 무릅쓰고 '무엇 무엇 하는' 것. 비록 그 '무엇'이 언제 폭격이 올지 모를 접경 지대 판자촌처럼 쓸쓸하고 허망한 것이라 해도, 그 허망함조차 받아들인 단 한 순간 행위와 상태는 그 스스로 완전하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앞으로 밀고 가는 삶처럼, 변할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고마는 사랑의 순간처럼, 며칠 후면 추하게 쪼그라들 꽃이 지금 한없이 아름다운 것처럼, 존재가 유한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없이 한 점에 응축하는 순간들이 있다.
롤랜즈의 책을 읽다말고, 내 오랜 세계관과 일치하는 부분에 이르러 마음이 한참 일렁였다. 모든 사랑은 우리를 만든 세계의 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에 도전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무한을 꿈꾸게 함과 동시에, 너와 내가 이 소멸 앞에 함께 서 있는 동지임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기인한 모든 시도는 유한한 존재의 선천적인 한계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실패한다 해서 그 도전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단 한순간의 빛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아름다우므로. 그리고 그 빛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 사랑의 다른 이름들이므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 순간의 진실과 고통이 거짓이 아니듯, 섬광처럼 찾아오는 순간의 빛 역시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완전하게 살아있을 수 있다. 너의 단점을 모두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나를 모르는 타인의 열렬한 고백보다 훨씬 달콤하듯이. 비록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해도, 우리를 다시금 살게 하는 것 또한 그 목소리다.
롤랜즈가 근사히 표현했듯, 삶은 영원한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환희 또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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