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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드립이 통하는 세계라는 것.

 

 

1
3월의 어느 날 몹시 치고 싶은 드립이 있었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인간은 습득한 정보를 상황과 맥락 안에서 가공,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상대에게 표현하고 공감받는 것이 지고한 행복 중 하나다. 내 드립은 다쟈레(말장난)에 가깝게 표현될 때도 있고, 몇 년 째 지식이 추가되지 않는 대학 시절 공부에서 연유한 것도 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치고 싶었던 드립은 롤 올스타에 관한 것이었다! 유럽의 엑스페케가 경기 끝나고 키스받고 싶다고 하자 한국 대표이자 선수들에게조차 센파이라 불리는 페이커는 '싫다. 친추도 하지마.' 라고 거절했는데- 그에 굴하지 않은 상대팀이 '사랑을 주세요, 센파이.' 라고 애교있게 답하는. 설명하면 구질구질해지는데다 롤팬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맥락의 드립이었으나 치고 싶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때마침 회사의 친구가 인셉션 드립을 치기에 받아치고, 이때다 싶어 '내 드립도 들어줘! 이해 못할테니까 맥락을 설명해줄게!'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 해대는 맥락설명형 드립은 지루하고 구차할 뿐이었다.

 

밥벌이에 아무 문제 없고, 다소 삐그덕거릴지언정 향후 10년 간은 걱정 없는데다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고, 복지도 최상급이었던 회사를 박차고 나온 원인에는 이 드립도 한 몫 했다. 이 회사에선 (비단 롤 뿐만이 아니라) 내 드립을 받아줄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 업무는 과중되지 않았다. 힘들었던 적도 없다. 다만,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우리는 평행선을 그리며 나아갈 것이라는 자각만큼은 선연했다. 그리고 이 환경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다. 오래 전, 책상에 "즐겁지 않다면 왜 하겠는가. 언제나 최선을 다하되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라" 메시지를 붙여놓고 일했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드립을 잘 받아주고 신선한 드립을 치곤 했던 스마트한 사람들을 만나 "난 롤드립을 받아줄 수 있는 곳에서 일할거야!" 선언했는데, 그것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해지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이제 일주일 뒤면 여행을 떠난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구직 활동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옛 회사의 친구가 그러지말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써보라고 해서 과감히 썼다. 고통스러운 영자 이력서와 캐릭터 대사를 활용한 국문자소서를 썼고, 그 결과 바로 다음 주 저 롤드립의 주인공 격인 회사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잘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안되어도 견학했다는 사실만으로 기쁠 것 같은 회사다.

 

2

한편, 오래 일했던 전 회사에서 내가 참으로 좋아했던 선배가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개성있고 재밌는데다 스마트하군, 생각했지. 그 선배가 오래된 조직의 불합리함에 고통받으며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반짝반짝 열정으로 빛나고 자기 일을 사랑했던 선배.

 

그런 선배가 결심했어요, 저 회사를 떠나 벤처에 몸담기로 했어요.

라고 말했을 때 마음 속에서 가만히 기쁨의 물결이 일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우리는 언제나 리부트 할 기회를 꿈꾼다. 방학을 지나 새학기를 맞기를. 다시 한 번 시작하기를.

선배의 미래에 빛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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