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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오랜 친구이자 10대 시절의 잔느; 였던 친구에게 고민 상담을 했더니 '너는 다정해질 땐 한량 없으니 조심해'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나는 그다지 다정한 사람은 아니고, 타인을 싫어하거나 경멸함으로써 얻게 되는 반대 급부로 너무도 심대한 타격을 입는 나머지 갈등의 포인트를 피해다니는 사람에 가깝다. 꽤 제멋대로 구는데도 주변인으로부터 미움을 사본 일이 거의 없는 것은, 이 균형을 맞추는데 내가 무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서리 내린 들판처럼 싸늘한 스스로의 에고/ 관찰자로서의 시점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가 텍스트와 그 안에 담긴 타자의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더 깊게, 실존하는 나와 인간적으로 얽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쓸쓸해.. 더보기
한여름밤의 판타지아, 여행의 추억 1한 여름의 판타지아를 보았다. 영화관을 나서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환기한 내 추억에 대해. 서두에 숫자를 붙인데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긴 글이 될 것 같다. 2오랜 지인들이라면 혹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2011년 여름, 나는 터키에 갔다. 한 강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을 하고 버스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싶었던 시절이었고, 마음이 가난해 일기도 잘 쓰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여행지에서 신고 다닐 튼튼한 운동화 한 켤레를 사러나갈 시간조차 없을 만큼 바빠 온 세상 모두를 진심으로 저주할 때였다. 그러나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를 보겠다는 일념에 새벽 잔업이 힘들지 않던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인들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그곳에.. 더보기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1 내 것이 아니라 생각되는 일엔 초연하려 노력한다. 억지로 우겨 잠시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있겠으나 맞춤옷이 아닌 일은 떠나기 마련이고, 그 상실은 아예 가지지 못했을 때보다 더 마음을 가난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끔은 내 그릇을 넘어설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몹시 갖고 싶은 것이 생긴다. 그럴 땐 좀 괴롭지만, 혹시나 있을 가능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한다. 다만 원칙은 거짓말 하지 않는 것. 어찌됐든 나는 그렇게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생길 때의 스스로를 좋아한다. 집중하고 열광할 때의 나. 열 두살 이래 나는 항상 소유할 수 없는 판타지 속의 무언가를 좋아했는데, 그 한편 내 애정의 대상이 오직 판타지일 뿐이라는 것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좋아함은 무아의 열광이.. 더보기
드립이 통하는 세계라는 것. 1 3월의 어느 날 몹시 치고 싶은 드립이 있었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인간은 습득한 정보를 상황과 맥락 안에서 가공,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상대에게 표현하고 공감받는 것이 지고한 행복 중 하나다. 내 드립은 다쟈레(말장난)에 가깝게 표현될 때도 있고, 몇 년 째 지식이 추가되지 않는 대학 시절 공부에서 연유한 것도 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치고 싶었던 드립은 롤 올스타에 관한 것이었다! 유럽의 엑스페케가 경기 끝나고 키스받고 싶다고 하자 한국 대표이자 선수들에게조차 센파이라 불리는 페이커는 '싫다. 친추도 하지마.' 라고 거절했는데- 그에 굴하지 않은 상대팀이 '사랑을 주세요, 센파이.' 라고 애교있게 답하는. 설명하면 구질구질해지는데다 롤팬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맥락의 드립이.. 더보기
영 레이디, "영 레이디, 당신 가슴 속의 깊고 어두운 구멍은 대도시에 살아서 생긴 게 아니에요. 보스처럼 어깨를 펴고 누구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는 양 절대 남앞에서 울지 않겠다는 양 굴어선 안 돼요. 가끔은 맘 속의 어린애가 마음껏 울 수 있게 해주고, 또 가끔은 온 생을 향해 단호하게 NO라고 얘기해야 돼요."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밤새 라키를 함께 마셨던 오젯의 말. 어제 새벽 문득 찾아본 여행일기에서 메모를 발견, 마음이 환해졌다. 그렇다. 관성의 힘으로 나를 밀고 끄는 생을 향해, 가끔은 온 힘을 다해 NO 라고 소리쳐야한다. 더보기
last smile 내 이별 테마곡은 꽤 오랫동안 SMAP의 last smile이었다. 이 곡이 수록된 음반이 나왔을 때, 나는 마침 오래 사귀었던 연인과 막 헤어진 참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이어폰을 꽂고 지하철 안에서 덜컹거리다말고 문득 들려온 가사에 숨이 콱 막혔다. "그런 슬픈 눈으로 마지막 말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신의 강한 척 하는 미소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변하겠지 / 안녕,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당신과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후회하지 않아. / 슬픈 때야말로 강하게 웃어보이던 당신의 눈에서 흐르던 뜨거운 눈물을, 나는 잊지 않아, 잊고 싶지 않아" 이별 후에도 그다지 울지 않았는데, 노래가 들렸을 땐 지하철 안이었는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이별의 순간이 올때면 .. 더보기
이별의 말은 부드럽게, 홧김의 이별이 아닌 이상 연인이나 친구와 헤어지는데는 무수한 이유가 존재한다. 너와는 미래를 함께할 자신이 없어서, 말이 안 통해서, 성격이 맞지 않아서. 하지만 이별에 대한 모든 이유는 구실일 뿐 포장을 뜯어낸 헐벗은 진실은 하나. 더 이상 이런 괴로움을 감내하면서까지, 혹은 내 또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아. 많지 않은 이별의 순간 나는 종종 상대에게 이야기했다. 널 좋아해, 하지만 너의 이런 모습까지 감당할만큼은 아냐. / 결국 넌 그걸 감내할만큼 날 좋아하진 않는다는 거잖아. 이런 내 말이 차갑고 건조하며, 자신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반응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것이 아니라면, 나도 당신도 상대에게 헤어지자는 말 대신 이걸 고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겠지. 헤어지.. 더보기
구겨지는 것이 아니라, 팀이 지금보다 작았던 2012년, 두 분의 대리님을 무척 좋아했다. 그 중 한 분인 조대리님은 여느 삼십대 중반 남자(이제는 사십줄...)와 달라 언제나 호기심이 넘치고 마음이 넓은 것이 장점이었다. 언뜻 무뚝뚝하고 말없어 보이지만 알고보면 꽤 수다쟁이에 집요한 구석이 있고, 인간에 대한 시선에 애정이 넘치면서도 적당히 무심한 부분이 있어 늘 편하고 좋은 사람이다. 다른 팀에서 잠깐 일을 했으나, 우리팀에 다시 인원이 필요해졌을 때 이 분이 적임이라 말했던 것도 나였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며 몇 주 말이 없으시다, 저녁을 먹자 하셨다. 속에 있던 말을 다 끄집어내어 전했다. 다른 데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스스럼이 없었다. - 대리님, 저는 사람을 잘 미워하지 않아요. 제 감정의 파고만으로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