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 지금보다 작았던 2012년, 두 분의 대리님을 무척 좋아했다. 그 중 한 분인 조대리님은 여느 삼십대 중반 남자(이제는 사십줄...)와 달라 언제나 호기심이 넘치고 마음이 넓은 것이 장점이었다. 언뜻 무뚝뚝하고 말없어 보이지만 알고보면 꽤 수다쟁이에 집요한 구석이 있고, 인간에 대한 시선에 애정이 넘치면서도 적당히 무심한 부분이 있어 늘 편하고 좋은 사람이다. 다른 팀에서 잠깐 일을 했으나, 우리팀에 다시 인원이 필요해졌을 때 이 분이 적임이라 말했던 것도 나였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며 몇 주 말이 없으시다, 저녁을 먹자 하셨다. 속에 있던 말을 다 끄집어내어 전했다. 다른 데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스스럼이 없었다.
- 대리님, 저는 사람을 잘 미워하지 않아요. 제 감정의 파고만으로도 책 한권은 쓸 수 있는 인간이라 타인에게서까지 그 마이너스 에너지를 받고 싶지는 않거든요. 감정의 하중을 피하기 위해 웬만하면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지면 보지 않는 편을 택해요. 이게 자기방어에 가까운 전략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상대로부터 몇 년 간이나 학대에 가까운 마이너스 감정을 받고 견딘다면 저같아질 거라 확신해요.
그런데 가장 괴로운 건 누군가를 미워하면 나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 상대를 싫어하는 한편 그 정도 사람도 받아주지 못하는 제 좁음을 싫어하게 되요. 결국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음을 알게 되는 거죠. 그리고 내 마이너스 감정을 또 타인에게 전하고. 그런 고리가 싫습니다.
저의 못된 점은, 제가 오래 언어를 다뤄왔기 때문이겠지만, 무심함을 가장해 가장 비수가 될 말을 준비했던 것처럼 할 수 있고 또 가끔 모르는 척 그렇게 한다는 점. 경멸스러운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다는 점. 같잖게 구는 꼴을 못보고 꼭 한마디 하고 마는 점. 마음이 식을 때면 천년의 사랑 앞에서도 서리 내린 들판처럼 차가워지는 점.
- 지희,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어, 좋은 시를 쓰는 선배야. 재래식 화장실에선 신문지를 비벼서 부드럽게 만든 뒤 화장지로 쓰거든, 아마 넌 경험이 없겠지만. 선배가 거기에 빗대 이런 시를 쓴 적이 있어.
나 구겨지는 줄 알았는데... 부드러워지는 거였구나.
다정한 대리님.
난 훼손된 게 아니라, 망가지고 구겨진 게 아니라, 부드러워지고 있는건가요.
그런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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