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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저녁의 유령들



쓰기는 사건과 감정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다. 

제 써? 질문을 종종 받는데, 게으르므로 이름 붙여주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만 쓴다.


좋은 영화나 그림, 책, 음악을 보거나 들었을 때 

이상하고 천박하거나, 아름답고 벅찬 순간을 맞았을 때

당신의 일부가 투명한 물 속 파란 조약돌처럼 반짝이는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잔뜩 흐트러진 스스로의 마음을 가만 가만 돌아볼 때,


- 깊숙한 곳에서 가만히 불씨가 당겨진다. 오래 잠들어있던 저녁의 유령들이 불빛을 받고 기다렸다는 듯 일어선다. 얼굴이 없는 유령에게 이목구비를 주고, 육체의 세부를 주고, 옷을 입히고, 마침내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많은 품이 든다. 그러나 형체 없던 것들이 내 세계에 단단히 붙박힌 실체가 되는 순간은 비할 데 없는 희열이다.


 이제 더 이상 유령이 아니게 된, 내 언어에 포섭된 이야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경험 후 반추되고, 짓이기듯 씹혔으며, 종국엔 내 세계에서 내 것이 된 기억들.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써라, 오래 전 T가 말했었지.


 T와 절교하던 날 그는 너의 문재를 사랑하는데 너란 인간은 좋아할 수가 없다, 했고

 나는 선배도 선배 글도 잘난 척이 너무 심해서 싫네요! 했다. 

 선배는 평론가로도 시나리오 창작으로도 데뷔했고, 지금도 재미있는 글을 쓴다. 

 심한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과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함께 들면서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신기하지;;

 

 너 왜 이리 게으르니, 이렇게 예민한데 혼자 느끼는게 억울하지도 않냐. 내가 너였으면 닥치고 글만 썼겠다. 좀 써라, 했었지.


 선배의 말을 떠올리면 그 동안 뭐했나 싶기도 하지만,

 쓴다는 것이 훈련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저녁의 유령들을 볼 때마다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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